보도자료실

우수직원 해외연수 중국 북경 스토리 글쓴이: 건강증진센터 임미현

페이지 정보

작성자 첨단종합병원 작성일2010-09-07 19:11 조회8,337회 댓글0건

본문

2010.8.20 오후 한시.....11층 회의실로 집합...
우수직원 해외여행 오리엔테션을 한다고 모이란다.드디어 여행을 가는가 보구나 생각이든다.
4박 5일동안 함께 생활 할 선생님들의 얼굴도 보고 여행기간 동안 보호자가 되어 주실 원장님도 뵙고..북경에서의 주의사항도 들었다. 절대로 제값 주고 물건 사지마란다..조심조심 소매치기..가방을 뒤로 메면 자기것이 아니란다..옆으로 메면..반틈만 내것이고..앞으로 메야..내것이란다,,ㅎㅎ

 먼저 연수를 다녀온 선생님들의 조언도 듣고 준비해서 가야 될것은 무엇인지 체크도 해보고...일주일이란 시간이 금방 지나간것 같다..출발 날짜가 다가올수록 기대와 설레임으로 기분이 묘했다..(속으론 엄청 좋음서...)

 1. 첫째 날(8월 27일-금요일)

 여행이란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또 다른 나를 찾아가는 것이 아닐까.
작년에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전 세계를 강타한 신종플루 덕분에 1년 늦게 16인의 여행자들은 세계의 중심축으로 부상하고 있는 북경을 4박 5일간 방문하게 되었다.
 ‘인류 최대의 토목공사’라 불리는 ‘만리장성’, 북경시 최대의 번화한 거리인 ‘왕부정 거리’, 중국의 소계림이라 불리는 ‘용경협’, 중국 민주화의 상징인 ‘천안문 광장’, 영화 마지막 황제의 배경이 되었던 ‘자금성’, 1998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 된 중국에서 최대 규모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완전한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는 황족 정원인 서태후의 여름 별장인 ‘이화원’, 명. 청나라 황제들이 매년 제사를 지내고 풍년을 기원하던 곳인 ‘천단공원’ 등 북경의 대표 명소들이 여행 일정에 포함되어 있었다.
 일부 직원들은 출발하는 날 쉬는 경우도 있었지만 부서의 특성상 오전 근무를 급히 끝내고 12시까지 응급실 앞 버스에 몸을 실었다. 빠진 물건은 없는지..다시 한번 체크..체크..(이제 북경으로 고고씽~~~)
 공항까지 가는 내내 여행에 대한 설레임이 타국에서 맞을 이질감에 대한 두려움을 압도하고 있었다. 또한 대부분은 직장 내에서 한 두번 이상 봐온 직원들이지만 직접 4박 5일간 한배를 탄 식구들이란 생각에 묘한 동질감과 이질감이 교차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출국 수속을 끝내고 2시 50분에 북경 수도 국제공항으로 출발하는 아시아나 항공기에 16인의 용사(?^^)들은 목숨을 맡겼다. 요즘 자꾸 불길한 항공기 사고들이 뉴스를 장식하여 설마 내가 탄 비행기는 아무 일 없겠지~하며 1시간 50분 내내 맘 졸인 건 사실이다. 나 죽고 나면 남편이야 새장가 가면 그만이지만 토끼 같은 자식들은 불쌍혀서...ㅎㅎ
 그렇게..비행기를 타고 가면서..(이륙 순간..주위에서 신음 소리가.. ㅋㅋ) 기내에서 늦은 점심을 샌드위치로 때우고 지루함을 느낄 즈음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베이징 서주 국제공항에 3시 50분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북경특유의 냄새가 난다 흠....~~ 북경과 우리나라는 1시간 시차가 발생하여 북경에 있는 동안 1시간 젊어지는 경험(^^)을 할수 있단다. (더 예뻐지겠는데...)
공항에 도착해서 입국 심사를 하려고 기다리다 순간 여기가 북경인지 인천 국제 공항인지...??? 왜냐면 주위에 거의 한국분들이 효도 관광하러 오셨기 때문이다..담양에서 오신분들 목포, 무안에서 오신분들..(나중에 이분들은 북경 관광 하면서..자주 보게된다..)
셔틀열차를 타고 35번 벨트에서 수화물을 찾아 셔틀버스에 오르니 5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버스는 생각보다 크고 깨끗했다..에어컨도 잘나오고...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새차 뽑은지 15일 되었단다..
가이드 생활을 16년째 하고 있다는 정순남 가이드가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일정 내내 한국말도 잘하고 박학다식한 가이드님 덕분에 즐거운 여행이 되었다. 물론 미남이어서 금상첨화였던 것도 부인할 순 없다.ㅎ (얼굴이 궁금하시면..보여드릴께요..)
 북경의 최고 기온은 28~29도, 야간에 15~18도 정도인데 10일 전까지만 해도 안개 낀 흐린 날씨로 바다와 120킬로미터 떨어져있어서 여름엔 사우나 찜질방 수준이이라 했다. 오늘은 여행에 최적의 좋은 날씨라 한다.
 가이드가 ‘즐거운 여행의 조건’ 세 가지를 얘기해 주었는데 맞는 말 같아 옮겨 적기로 했다. 첫째, 열린 나의 마음-문화와 수준의 차이가 많이 나니 여행자는 ‘그려러니~’하라는 것이다. 둘째, 좋은 여행 동반자가 되라는 것-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내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셋째, 좋은 가이드- 좋은 가이드는 여행의 질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여행하는 내내 피부로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북경오리로 저녁식사를 하였는데, 오리 특유의 냄새가 너무 강해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 사가지고 갔던 김치를 부슬거리는 밥이랑 먹으면서 앞날이 캄캄해져 옴을 느꼈다. 가이드 말로는 한국여행객이 많아 많이 개선시킨 거라 그런대로 먹을 만하다 했는데 어찌야쓸꼬...
 저녁식사를 대충 끝내고 서커스를 구경했다. 실력들이 출중했는데 국가 2~3급 대표팀이라 한다. 잘하면 1급으로 승진하기도 하는데 1급은 국제적 공연을 한다했다.
 서커스 공연 관람을 끝내고 'The Place'야경감상을 하러갔다. 100미터 정도 되는 두 건물 옥상을 연결하여 만화영화, 가수들의 공연 등이 상영되고 있었다. 화려한 색채와 넓이에 쳐다보느라 목이 아픈 줄도 몰랐다. 수많은 사람들이 커피숍에서 차를 마시고, 쇼핑을 하고, 아이들과 커다란 풍선(?이름은 잘 모르겠음. 신기해서 하나 샀다가 크기 때문에 애를 먹었음)을 가지고 노는 여유로운 모습들은 공산주의 체제가 절반은 남아있어 경직되어 있을 거라는 평소 나의 생각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숙소인 프라자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30층 가까이 되는 오피스텔 30여개가 즐비하게 늘어져있는 곳을 지나게 되었다. 이 모두가 자수성가한 40대 반씨아저씨 소유라는 것이다. 중심가 오피스텔 한 달 월세가 600만원 정도 할 거라고 하니 얼마나 부자인거야? 그런데 중국 10대 부자에 들지도 못했다니 중국에 부자가 얼마나 많은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 옆에 베이징에서 가장 높은 79층짜리 빌딩은 네다리를 땅에 튼튼하니 콱 박고 당당하고 늠늠하게 빌딩숲 속에 우뚝 서서 한껏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일정 내내 한 호텔에 투숙하여 아침, 저녁 숙소를 오갈 때마다 반씨아저씨 오피스텔이랑 79층 최고층 빌딩을 지나쳤지만, 그때마다 79층 빌딩이 너무 높아 카메라에 담기도 어려웠다.
 중앙공급실 김인경 선생님과 한방에 묵게 됐는데 선생님의 순수하고 꾸밈없는 모습들이 그대로 전해져와 금방 친해졌으며, 참 좋은 길동무를 만난 것 같아 이번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 되었다.
 첫날의 설레임이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즐거운 여행을 위해 숙소 한방의 모이기로 하였다..시간은 10시정도.. 한국 시간 11시이다..첨보는 선생님들과 서로 인사도 하고 간단히 자기 소개도 하고. 어색했던 분위기를 한잔의 술로 바꿔가기 시작했다..

2. 둘째 날(8월 28일-토요일)

 오늘은 만리장성 가는 날..
 7시에 기상 콜을 받고 열심히 단장(?)을 끝내고 호텔 뷔페로 아침을 해결했다. 어제 저녁 북경오리에 비하면 정말 먹을 만했다. 8시 30분까지 호텔 로비에서 모이기로 했건만 어제 새벽까지 어색한 분위기를 여러 잔의 술로 바꾸려는 선생님들 덕분에 늦은 분들이 있어서 8시 50분에 버스가 출발했다. 일정상 쬐끔 늦어진 것이다...(이것도 여행에서 빠지지 않는 레퍼토리...~~~) 이것이 출발인지 몰라도 신호등이 별로 없는 상황에 비해 사고가 별로 없다고 했던 가이드의 말과 다르게 접촉사고가 있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서로 잘했다고 싸우고 목소리 높이고, 목부터 잡고 내릴 텐데..여긴 그런게 없다. 렉카차도 않 오고 경찰도 않 온다..주위 차량들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다. 당사자끼리 구름과자 나눠 드시공..그냥 현금으로 사고를 마무리 한다. (중국 돈으로 200원... ) 뤼~~따거(기사분)가 뽑은지 15일 된차라며..별로 인상이 않좋다..그후로 우린..뤼따거분의 자꾸 눌러대는 경적 소리를 여행 끝날때까지 계속 들어야 했다.
 북경관광은 일명 발광(발로 하는 관광)이라 한다. 오늘 만리장성을 가기로 했다. 그런데 원래는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 올라 여유롭게 관광을 할 일정이었는데, 며칠 전부터 케이블카가 파업 중이라더니 오늘도 여전히 파업 중이어서 걸어서 올라가야 한단다. 운동화를 신고 만반의 준비는 하고 왔건만 워낙 걷는 것도 싫어하는 체질이라 보통 걱정이 아니다. 하지만 몇 년 전 장흥 천관산을 날았던(^^) 실력으로 아자아자 홧팅!

 ‘만리장성’ [萬里長城, Great Wall of China]은 북쪽의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진나라 시황제가 증축하면서 쌓은 산성이며 명나라 때 몽골의 침입을 막기위해 대대적으로 확장하였다. 198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인류 최대의 토목공사’라고 불리는 이 거대한 유적은 중국 역대 왕조들이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세운 방어용 성벽이다. 지도상 연장 길이 2,700㎞이며, 중간에 갈라져 나온 지선들까지 합치면 총 길이가 약 5,000~6000㎞에 이른다. 동쪽 산하이관[山海關]에서 서쪽 자위관[嘉?關]까지 동서로 길게 뻗어 있다. 보통 만리장성의 기원을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 때로 잡지만 그보다 훨씬 전인 춘추시대(BC 770~ BC 443)부터 북쪽 변방에 부분적으로 성벽이 건축되었다. 통일 왕국인 진나라가 들어서면서 북쪽의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이들 성벽을 연결하고 증축한 것이다. 당시의 만리장성은 동쪽 랴오양[遼陽]에서 서쪽 간쑤성[甘肅省] 민현[岷縣]까지로 지금보다 훨씬 북쪽에 있었다.

 ‘만리장성’이 현재 위치에 처음 축성된 것은 6세기 북제(北齊) 시대이다. 처음 건축될 무렵의 길이는 산시성[山西省] 리스 현부터 보하이만[渤海灣]까지 약 1,500㎞였다. 이후 명(明)나라 때 총 길이 2,700㎞에 이르는 현재의 규모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명 나라는 15세기~16세기에 만리장성에 대한 대대적인 개보수 작업을 진행했는데, 당시 북방에 있던 몽골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북방민족인 만주족이 세운 청(淸) 왕조에서는 군사적 가치가 없어 방치되어 있다가, 중화인민공화국 때 관광 목적으로 보수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만리장성’ 2,700㎞가 똑같은 구조와 재료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이중으로 축성된 곳도 있고, 성벽의 높이나 폭도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대체로 서쪽보다는 동쪽이 견고하게 축성되어 있다. 성을 쌓은 재료는 햇볕에 말린 벽돌과 이것을 불에 구운 전(塼), 그리고 돌 등인데 동쪽으로 갈수록 더 단단한 재료를 사용했다. 성벽은 높이 6∼9m, 평균 폭은 위쪽 4.5m, 아래쪽 9m이다. 100여 m 간격으로 망루를 설치하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중국 역대 왕조들이 만리장성을 쌓은 가장 중요한 목적은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왕조의 성격에 따라 만리장성의 중요성이나 만리장성에 쏟는 정성도 달라졌다. 왕조가 공격적이었던 시기보다는 방어적이었던 시대에 만리장성은 더욱 중시되었다. 북방 경영에 열심이었던 당나라 때나 전 세계를 무대로 침략전쟁을 벌였던 몽고제국과 뒤이은 원나라, 만주에서 일어나서 만리장성 너머까지 다스렸던 청나라 때는 그 중요성이 크게 떨어지고, 따라서 개보수 작업도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만리장성’은 군사적인 역할 이외에 문화적으로는 유목문화와 농경문화, 중원과 변방을 가르는 경계선의 역할도 했다. 중국 역대 왕조들이 만리장성에 들인 노력과 비용에 비해서 방어벽으로서 역할은 크지 않았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 실효성에 관계없이 오늘날 만리장성은 중국을 대표하는 명물이 되었다.
 열심히 땀을 뻘뻘 흘리며 두 번째 망루까지 올라갔다 왔다. 올라가는 동안 퍼져오는 냄새는 아주 환상적이다..중간 중간에 있는 화장실 때문인지 몰라도 향굿한 스멜이 풍겨져 온다..숨은 목까지 차오고 냄새는 코를 자극하고.ㅋㅋ
 인간의 위대함에 앞서 대략 500~800만 명의 인명이 희생 되었을 거라 추정된다고 하니 마음이 숙연해 졌다. 응급실 김 호 과장님과 유성훈, 한경훈샘은 세 번째 망루까지 올라갔다 오셨다. 대단한 체력과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세계 최고의 불가사의를 올라가 본 것에 의미를 두기로 했다.
 2시 20분 정도에 중국 무술 영화의 배경이 되기도 한 자연 산수를 구경할 수 있는 ‘용경협’으로 출발했다. 40분에서 1시간 이면 도착한다던 그곳은 5시 10분에 도착했다. 시작이 그러했듯이 고속도로 위에서 9중 추돌 사고가 났는데..수습이 안되고 있어서 차량이 밀린다고 한다..공안이 있는데............... 어떻게 할수 없으니 기다리란다..ㅎㅎ 더 웃긴 건..누구하나 화를 내는 사람도 없고..그냥 정체된 차량 옆에서 자리 깔고 앉아 게임하며 웃고 있다.. 우린 답답해 죽겠는데...ㅠㅠ
 배가 고프다기 보다 입이 심심해서... 가져갔던 컵라면의 면을 ‘뿌셔뿌셔’를 만들어 먹었는데 그것도 별미였다.
 반대편 차선으로 달리는 차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같으면 삿대질을 하고 날 리가 났겠지만 이 나라는 정상적으로 오는 차가 아무 말 없이 옆으로 비켜가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한 자리에 한 두 시간 정체되어 있어도 여유만만인 그들의 태도에 어이없기도 하면서 때론 그들의 체념과는 다른 또 다른 무엇인가가 내재되어 있는 것 같아 두려움도 느껴졌다. 나중에 들으니 5시간 정도 지체된 여행 팀도 있었다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단한 나라임엔 틀림없는 것 같다.
 ‘용겹협’은 북경 외곽에 위치한 팔달령에서 40분 정도가 걸리는 곳에 위치해 있다. 남방 산수의 부드러움과 북방 산수의 웅장한 면모를 모두 갖추고 있으며, 또한 "작은 계림(小桂林), 작은 삼협(小三峽)"이라고 불릴 만큼 높이 솟은 가파른 봉우리들이 장관을 이룬다.
북경의 16 명소 중의 한 곳으로, 전체 면적은 119㎢이며, 주요 명소는 70m 높이의 콘크리트 댐으로 중국의 북방 지역에서는 최대 규모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이곳을 여행하는 관광객들은 여름에는 폭포, 겨울에는 얼어붙은 폭포를 볼 수 있다. 7㎞ 길이의 배 유람은 또 하나의 절경을 연출한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나와 산길을 따라 조금 걸으면 10분 간격으로 유람선이 대기하고 있다. 그러면 배를 타고 진강사와 같은 역사적 장소들도 구경할 수 있다. 강은 절벽 측면을 따라 흐르며, 관광객들은 종산(鍾山), 봉관도(鳳冠島)와 같은 깎아내릴 듯한 절벽 등의 30여 가지의 절경을 즐길 수 있다. 이곳은 여름의 평균 기온이 6.4℃로 북경 시내보다는 낮다.
 봄부터 가을까지 "작은 계림"이라 불리며, 시원한 아름다움으로 빛을 발하던 용경협은 겨울이 되면 물이 얼어 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하지만 이곳은 아쉬움 대신 환상과 즐거움으로 가득한 또 다른 아름다움을 뽐낸다.
환상적인 얼음의 축제, '빙등예술절(氷燈藝術節)'이라고 불리는 이 행사는 매년 1월부터 약 두 달간 4,000평방미터의 얼음바닥 위에서 진행되며, 올해로 벌써 16회를 맞고 있다.
 빙등제는 이미 하얼빈의 것으로 유명해졌지만, 이곳의 빙등제를 "작은 하얼빈의 빙등제"라 불러도 될 만큼 그 재미와 아름다움에 있어서 그것에 뒤지지 않는다.
‘용경협’은 하루 안에 충분히 돌아볼 수 있다. 차를 타고 입구에서 내려서 20분 정도 걸으면 댐에 도착할 수 있다. 그리고 거기서 258m의 에스컬레이터를 타게 된다. 이 에스컬레이터는 1996년에 완공되었으며, 용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길 이면에 있어서 기네스북에 올라 있기도 하다.

 저녁식사는 아마 다른 곳에 예정되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용경협에서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용경협 앞 식당에서 중국식으로 저녁식사를 해결했다. 여전히 김치 없인 밥을 먹기가 힘들었다. 우리 병원 식당 밥이 얼마나 맛있는지를 굳이 북경까지 와서 느껴야 하다니. 광주가면 병원 밥 열심히 맛있게 먹겠다고 이구동성으로 다짐했다.
 다행히 도로정체가 풀렸다고 연락이 와서 숙소로 출발할 수 있었다. 차에서 밤을 지새워야 하는 건 아닌지 은근히 걱정을 하던 찰나여서 무지 반가웠다. 9시 50분에 숙소에 도착하여 씻고 아침까지 정신없이 잤다.
 험난했던 하루가 지나가는게 아쉬운 몇몇 선생님들은 어색한 분위기 달래기 위해 새벽까지 또 달렸다는.....정말 대단한 체력 들이다..

3. 셋째 날(8월 29일-일요일)

새벽 늦게 까지 달리던 샘들은 여전히 비몽사몽으로 아침식사 자리로 나왔다...
(몇시~~?? 새벽 4시~~한국시간 5시 ...헐~~)
 오늘은 일정이 빠듯하여 조식 후에 8시 10분까지 버스에 승차했다. 40분 정도 이동하여 수도박물관(역사박물관)으로 갔다...국립 박물관이 지금 수개월째 보수공사 중이라 부득이 하게 코스를 수도 박물관으로 잡았다고 한다..수준은 비슷하다고 하니 그리 손해 보는 기분은 아니다..( 어차피 국립 박물관에 갔어도 보는것은 같을거라는..혼자만의 위안을 삼으며...)
들어가는 입구에서 갑자기 검문을 한다...죄지은게 없어도 웬지 살벌하다..ㅎㅎ 모두 무사히 통과 하는데 갑자기 우리 일행중 한명을 불러 세운다..
가방을 압수하더니 내용물을 모두 빼본다..(헉~~~무슨 일이..)ㅎㅎㅎ 이런..어제 점심때 먹다가 남은 고량주 한병을 가방속에 넣어 두었다가 그게 검문에 걸렸다고 한다....누구라고 말할순 없고 아주 술을 사랑하시는 선생님이시다..ㅎㅎ 우리 일행중 말 안해도 알수 있을 터...
1시간 정도 둘러 보는데 역시나 그러하듯 박물관은 그 나라의 역사를 알수 있는 곳인거 같다...모두 구경하고 나오는데..술을 사랑 하시는 선생님께서 갑자기 입구쪽으로..다시 가신다..왜????? ~~~~압수 당했던 고량주를 가지러...ㅋㅋ
그렇게 박물관을 빠져 나와 라텍스 박물관을 둘러보고 점심은 오랜만에 삼겹살과 된장찌개로 먹었다. 대패 삼겹살 모양의 조금 두꺼운 냉동삼겹살 한 점이 천원이었다. 비싸긴 했지만 타국에서 먹는 삼겹살은 정말 별미였다.
 ‘이화원’으로 가는 길에 양 옆에 즐비하게 서 있는 20~30층 이상의 각 가지 모양의 수많은 건물 숲속을 아우디, 폭스바겐 (북경의 국민차)등 수많은 비싼 외제차들과 달리다 보면 왠지 모를 압박감이 밀려왔다. 제 자리 걸음은 퇴보와 같다지 않는가.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아이들과 꼭 같이 와서 발전해 가고 있는,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에서 세계적 국제도시로 탈바꿈되고 있는 북경의 모습을 같이 볼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해 본다.
이제 이화원으로 고고씽~~~
이화원으로 가는 길에 이화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화원은 예전에 자희태후 (서태후)가 휴가를 보내러 오던 곳이란다.함풍황제와 본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황제에 올려놓고 뒤에서 조정하다 서태후에 심한 간섭으로 스트레스를받은 황제는 정치를 하지 않고 기생집에 드나들다 ??으로 일찍 죽었단다. 그후 서태후에 여동생의 아들을 황제자리에 책봉하여 국사를 보게 하였으나 이또한 서태후가 모든 일을 간섭하였단다.
황제나이 16세 혼인을 시키려는데 서태후가 정해 준 여자랑 혼인을 하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여자는 서태후의 두번째 동생의 딸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황제랑은 사촌 사이인 것이다.
(그것도 연상녀...)
그리하여 혼인을 하게 되었지만 평생에 한번도 둘이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긴 이해가 간다....ㅠㅠ) 둘사이가 사촌사이인것도 있지만 황제비가 너무나 못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밥을 먹을때도 얼굴을 볼수가 없어 식탁을 황제가 직접 제작하여 식탁 아래 금붕어를 풀어놓고 밥먹을땐 금붕어만 보고 밥을 먹었다고 한다. 황제비의 사진을 보여줬는데 나같아도 금붕어만 보고 밥을 먹었을거 같다.(진짜로 이해가 간다....ㅠㅠ 인증샷 참조 가능)
그럼 황제는 누구를 사랑하였을까???? 이후 진비라는 후궁이 있는데 정실 부인을 맞이하고 기본적으로 몇명을 후첩으로 들수 있다고한다.. 그중하나가 진비이다.(남자 선생들의 부러운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짐승...)
후첩중의 하나인 진비는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 한다. 미모도 출중하다고 한다. 지금의 미녀의 기준과 그시대의 미녀의 기준은 완전히 다른가 보다.. 사진을 보여졌는데 진비의 모습은 오동통하고 완전 복스러운 모습이었다. (인증샷 첨부 가능..) 같이갔던 일행중에 정신건강병동의 한XX선생님과 거의 비슷하게 생겼다.(혹시 아실려나..)그 뒤로 우리는 한XX에가 진비라고 부르기로 했다.(님~~~~~~~~별명이 잘 어울리는듯..)
이제 이화원으로 발광(발로 하는 관광)해볼까요~~~!! 자희태후 즉 서태후를 빼고 ‘이화원’을 얘기할 수 없다. 자희의 성은 엽혁나라 ,청나라 제7대 황제 함풍(1851년~ 1861년 재위)의 귀비로서 함풍이 죽은 후 "수렴청정"의 명의로 48년 동안이나 조정의 대권을 독점하였다. 1905년 네덜란드 화가 Hubert Vos가 초청에 의해 자희태후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해 그의 연세 70을 넘었다. 화상은 현재 덕화원 내에 보전되어 있다.
 ‘이화원(이허위안)’은 북경시 서북 교외에 위치, 도심에서 약 19키로미터 거리로 청나라 때의 황실 원림과 행궁이었다. 이화원은 북쪽은 만수산을 등지고 남쪽은 곤명호를 안고 있다. 불향각을 주체로 지형과 수면을 충분히 이용하여 가산의 조성으로부터 길의 주향, 전당. 누가의 배치로부터 다리의 조형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전통적 원림 조성 기예를 충분히 계승, 발양함으로써 상부상조의 전체적인 원림 예술 효과를 나타내었다.
 금나라 때인 12세기 초에 처음 조성되어, 1750년 청나라 건륭제(乾隆帝) 때 대폭 확장되었다. 당시에는 칭이위안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1860년 서구 열강의 침공으로 파괴되었다. 이후 서태후(西太后)가 실권을 쥐고 있던 1886년 재건되면서 이허위안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주로 이곳에서 수렴청정을 했던 서태후는 일시적인 피서와 요양 목적으로 건설되었던 이허위안에 각종 전각과 사원을 추가해 본격적인 국사를 볼 수 있는 궁전 형태로 변모시켰다. 이허위안 재건비용 때문에 청나라가 1894년 청·일전쟁에서 패배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막대한 자금을 들였다고 한다.
 이허위안에는 거대한 인공호수와 60m 높이의 인공산을 중심으로 각종 전각(殿閣)과 사원, 회랑 등 3000여 칸의 전통 건축물이 자리잡고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총면적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거대한 인공호수 쿤밍호(昆明湖)다. 호수라기보다는 바다처럼 광활해 인공으로 만들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항저우(杭州)에 있는 시호(西湖)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쿤밍호 북쪽에 있는 약 60m 높이의 완셔우산(萬壽山)은 쿤밍호를 조성할 때 파낸 흙을 쌓아 만든 인공산이다. 건축물들은 모두 산의 남쪽 기슭을 따라 배치되어 있다. 산 정상에 있는 불당 즈후웨이하이(智慧海)는 드넓은 쿤밍호를 비롯한 이허위안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바로 아래 21m 높이로 우뚝 솟아 있는 6각형의 불전 푸시앙가오는 이허위안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물로 꼽힌다. 이외에도 서태후가 정사를 보았다는 런서우디엔, 홀로 휴식을 취했던 곳으로 중국 최대의 경극극장이 있는 더허위안(德和園),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는 파이윈디엔(排云殿) 등이 유명하다.
 이허위안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건축물은 창랑(長廊), 즉 긴 복도다. 길이가 778m, 273칸으로 중국에서 가장 크고 긴 복도이며, 천장과 벽에 수많은 그림이 그려져 있어 ‘중국 최대의 야외 미술관’으로 불린다. 이외에도 중국의 안녕을 기원하며 만들었다는 쿤밍호에 떠 있는 듯한 돌배(石舟), 여러 개의 돌다리, 아름답게 조각된 수많은 석상들을 볼 수 있다.
동궁문
 이화원 정문이다. 문은 삼명이암의 무전식 건축으로, 중간 정문은 "어로"로 황제, 황후가 출입하고 양쪽 문은 왕공, 대신들이 출입하며 태감, 병졸들은 남북 양측 옆문으로 출입하였다. 편액의 "이화원" 세 글자는 광서 황제가 쓴 것이다. 운룡석에 구슬을 갖고 노는 두 마리의 용이 부조되어 있는데 용은 황실의 존엄의 상징이며 또한 유지와 칙령의 표징이다.
인수전
 궁정구의 주요 건축물의 하나로서 원명은 근정저, 광서 연간에 현재의 이름으로 개칭, 어진 정치를 베푸는 자는 장수한다는 뜻이다. 인수전은 청나라 말년 자희태후와 광서 황제가 정무를 보던 대전이며, 또한 중국 근대사상 변법유신 운동의 획책지의 하나이다. 1898년 광서 황제가 이 대전에서 개량과 두령 강유위를 소견하고 총리 각국 사무 아문장경상행주로 임명, 이로부터 유신 변법의 서막이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봉건 보수 세력의 반대로 "백일 유신"은 끝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낙수당
 대형 사합원으로 자희태후의 침전이다. 대전은 붉은 기둥에 회색 지붕으로 조형이 특이하고 웅장 화려하다.
대희루
 큰 정원 "덕화원"내에 건조, 현재 중국에서 보전되고 있는 최대의 고대 극장으로서 높이 21미터, 상,중,하 3층으로 나뉜다. 아래층 천정판 중심에 천창을 내어 위층 무대와 통하게 되어 있으며 중간층 무대는 권양기로 도구와 배경을 위 아래로 오르내릴 수 있게 교묘하게 설치하여 변화무궁하다.
장랑
 동쪽의 요월문에서 서쪽의 석장정까지 총 길이 728미터, 도합 273칸의 화랑으로 중국 회랑 건축 중 제일 크고 제일 길고 제일 명성이 높은 장랑이다. 장랑의 채색화 제재는 꽃, 새, 나무, 돌, 산, 물, 인물 등 매우 광범위하다. 8세기 중엽 건륭 황제(기원1736-1796년 제위)가 궁정의 화가를 서호에 파견하여 사생하게 하였는데 546폭의 서호 경치를 그려 장랑의 273칸 화랑의 들보에 전부 옮겨 그렸다. 금세기 60년대 중국정부는 서호풍경화를 보류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족특색을 지닌 채색화 1만 4천여 폭을 더 그려 장랑을 제일의 화랑으로 되게 하였다.
불향각
 만수산 전산 비탈 21m 높이의 거색기반 위에 건축, 남쪽은 곤명호를 마주하고 북쪽은 지혜해불전을 등지며, 이 불향각을 중심으로 각 건축군이 매우 정연하고 대칭되게 양 날개로 펼쳐지면서 서로 호응하여 마치 한 마리의 박쥐모습을 하고 있다.1860년 불향각은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불타버리고 그 후 원상태로 재건하였는데 이는 라마교의 건축물이다.
청연방(석배)
 석방이라고도 한다. 1755년에 건조, 몸체는 거석을 조각하여 만들었다. 총길이 36m, 상하2층 선실이 있다. "물(백성)은 배(왕조)를 띄울 수도 있고 전복시킬 수도 있다."는 뜻을 취하여 청왕조는 반석과 같이 튼튼하여 물이 전복시킬 수 없음을 비유하였다.
17공교
 곤명호 동쪽 제방과 호심의 남호도를 연결하는 대형 석교로서 총길이 150m이다. 교두와 난간 기둥에 도합544마리 돌사자가 조각되어 있는데 형태가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점심식사를 위해 가는 길에 ‘하미과’라는 멜론처럼 생긴 과일을 잘라서 한 꼬지씩 팔았는데, 달고 수분도 많아서 맛있었다. 갈증을 푸는 데는 그만이었다. 식사는 중화요리를 먹었다. 그런대로 먹을 만 했지만 여전히 김치, 고추장, 김이 최고의 반찬이다.
 ‘천단공원’은 황제가 제사를 지내던 천단(天壇 : 티엔탄), (Temple of Heaven: 세계문화유산, 1998) 명·청나라 황제들이 매년 제사를 지내고 풍년을 기원하던 곳으로, 북경시 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전체면적은 270㎡이다. 명 영락(永樂) 4년(1406)에 지어지기 시작해서 영락 18년(1420)년에 완성되었다. 천단은 중국에서 현존하고 있는 가장 완전하고 규모가 가장 큰 제사행사 건축군 이다.
 천단은 "하늘"을 상징하는 사당 건축물로, 명·청나라 황제들이 매년 하늘에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당시의 황제에 봉해진 자들은 스스로를 "천자"로 간주했기 때문에 대자연을 숭배했으며, 천지를 숭배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제왕의 중요 업무였다. 그래서 고대 설계사들은 "하늘"을 상징하는 건축물을 짓기 위해 힘을 다했다.
 천단은 위에서 내려다보면 명확하게 내벽과 외벽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북쪽의 벽은 원형, 남쪽의 벽은 사각형으로 원형은 하늘을 상징하고 사각형은 땅을 상징한다. 이것은 중국 고대의 "천원지방(天圓地方 :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이다.)"에 부합하는 것이다. 북쪽 벽은 또한 남쪽 벽에 비해서 높은데, 이것 또한 "천고지저(天高地低 : 하늘은 높고 땅은 낮다)"의 의미를 나타낸다. 이 두 개의 벽은 또한 천단을 내단과 외단으로 구분하는데, 주요 건축물은 내단에 있다. 북쪽에는 기년전(祈年殿)과 황건전(皇乾殿)이 있고, 남쪽에는 원구단(圓丘壇)과 황궁우(皇穹宇)가 있다.

천단공원 내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축물은 기년전(幾年殿)으로, 황제가 오곡이 풍성하기를 빌던 곳이다. 삼중 처마로 된 원형 궁전이며, 높이는 38m이다. 3층으로 이루어진 푸른 지붕은 유리기와라 불리고 하늘을 상징하는데 명대에는 아래부터 자주색, 황색, 푸른색의 3색이었다고 한다. 중앙의 '용정주(龍井柱)'는 일 년 사계절을, 가운데 12개의 기둥은 12개월을, 바깥쪽의 12개 기둥은 12시진(2시간)을, 내외 처마 기둥 24개는 24개의 절기를 각각 상징한다.
 제천(祭天) 의식은 예로부터 국가의 중요한 행사로서 역대 황제에 의해 행해졌다. 이 제사를 교사(郊祀) 또는 남교(南郊)의 제사라고 하였으며, 제단은 수도의 남쪽에 설치하였다. 현존하는 천단은 베이징[北京] 외성(外城)의 남동쪽에 있으며, 약 6km의 성곽을 두르고 안에 원구(?丘)·기년전(祈年殿)·황궁우(皇穹宇) 등의 건물이 있다. 원구는 흰 돌[白石]로 3중으로 지은 대원구(大?丘)로서 하늘을 본떠서 만든 것이다.
 기원전은 기년전의 북쪽에 있는 백석삼중단상(白石三重壇上)에 축조한 푸른 유리 기와로 지은 원형 3층의 아름다운 건물로서, 기곡(祈穀)의 예식을 행하였다. 천단은 명나라 태조 홍무제(洪武帝)가 난징[南京]에 대사전(大祀殿)을 짓고 천지(天地)를 함께 제사한 데서 비롯하며, 영락제(永樂帝)의 베이징 천도 후 베이징 남교로 옮기고, 가정제(嘉靖帝) 때 원구와 대향전(大享殿)을 축조하여 제천(祭天)의 장소가 되었다.
 청나라 건륭제(乾隆帝) 때 개수 확대하면서 대향전이 기년전으로 되어 현재와 같은 규모가 되었다. 기년전은 광서제(光緖帝:재위 1874∼1908) 때 소실했기 때문에 1890년에 재건하였다.

 중국 A급 배우들이 출연한다는 ‘금면왕조 쇼’를 관람하러 가기 전에 ‘중일우호병원’과 ‘조양병원’을 둘러보고 단체사진촬영도 하였다. 깨끗한 현대식 건물과 내부시설 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연수 인증 샷....ㅋㅋ )
 공연 관람을 위해 이동~~이동~~여전히 시내 교통은 복잡하다.. 뤼따거의 경적 소리를 들으며..푸~~~우
금면왕조 쇼는 영어 중국어 한국어로 소개를 해준다(여행객을 위한 배려....) 자리는 특A급 자석이다 무대정면 한가운데.. 큰 기대없이 자리에 앉아있는데 절대로 촬영은 못하게 한다. (대충 몰래 몰래 몇장은 찍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화려한 조명과 신기한 무대장치들로 인하여 우리의 탄성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실로 장관이었다.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무대장치들.. 그리고 고정관념을 깨뜨린 물 폭포쇼.. (히히히히) 아무튼 대단했다. 연기도 연기이지만 쏟아지는 신기한 무대장치들과 연출들이 장난아니었다. (장난이었으면.....)
공연이 끝나고..출연 배우들과 포토 타임을 가졌는데..이런..금방 들어 가는 바람에 몇장 못찍었다.. 완전 아쉬움이 ... 멋찐 총각들 많았는데...언니들도.....ㅉㅉ
 ‘금면왕조 쇼’는 가설의 설화로 인간의 단순한 사랑 이야기를 스펙타클한 무대장치와 무대조명, 화려한 의상과 완벽한 배우들의 연기가 어우러져 한 편의 멋진 공연예술을 보여주는 시간이었다.
 저녁식사는 샤브샤브로 먹었는데 식사때마다 들리는 소리가 있다."칭따오 비조 쓰가" 참 신기하게도 종업원들은 잘도 알아 듣고 맥주 4병을 가져온다..다른건 시킬줄 몰라도 맥주만큼은 자신있게 주문을 하시는 선생님...누굴까요..??
나름대로 샤브샤브는 먹을만 했다. 하지만 김치와 장조림 고추장은 가장 잘팔리는 반찬이다. 식사에 반주로 먹은 맥주와 음료수 가격이 가이드가 계산하는 것과 여행객이 계산하는 것에 엄청난 차이가 있어 깜짝 놀랐다. 우리나라도 마트와 식당에서 음료 가격이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곳은 더욱 심한 것 같다.
저녁 식사 후 전신마사지를 받으러 갔다. 온몸의 피로를 풀어준다고 해서 기대를 하고 갔다. 도착순간 남자선생님 따로 여자선생님들 따로 ... 각각 방을 나누어 들어가는데 늦은 저녁시간이라 그런지(9시.. 한국시간10시) 몰라도 더 이상하고... 느낌이 ....음~~~(--; 이상한 생각.. 남자는 여자가... 여자는 남자가... 므흣)마사지는 한시간정도 진행되는데 시원하다는 사람과 멍이들 정도로 아프다는 사람... 의견이 분분하다 그래도 하루의 피로가 날아가는 기분이다.
숙소로 이동한다.. 어느듯 셋째날 저녁이다. 시간이 언제 갈까??? 하고 생각 했었는데 어느새 내일은 관광의 마지막날이 되었다. 하루하루 에피소드가 있는데 내일은 또 어떤 에피소드와 재미난 일들이 있을까 내심 기대가 된다. 콜벨이 울린다...(Ring~~~~) 이건 또 달리자는 건데.. ㅠㅠ 여전히 오늘 저녁에도 아쉬워 하는 선생님들은 술과 달리고 달리고 막 달리고 또 달린다... (지치지도 않은 체력들....부럽...)

4. 넷째 날(8월 30일-월요일)

 오늘은 발광의 극치인 천안문광장과 자금성을 가는 날!!........어찌할꼬 어제도 달리던 선생님들이 이제는 적응이 되가는거 같아 보인다.얼굴빛하나 변하지 않고 멀쩡한 모습으로 제시간에 맞추어 8시까지 호텔 로비로 모였다. 천안문광장에서 자금성까지 4~5킬로미터 되니 가이드가 걷는 속도로 걸으라는 당부를 들었다. 다시돌아오지 않은 길이니 혹시 낙오가 되거든 기다리거나 돌아가지 말고 그냥 직진만 하라고 한다. 나가는 문은 하나이니 어디서든 만날수 있다고 한다.(소매치기 조심.. 또 조심)광장 가운데서 인증샷을 날려주고 이제 관광하러 출발~~~ GO GO!!
 ‘천안문광장(天安門廣場)’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상징이다. 天安門 앞에 펼쳐져 있는 중국 최대의 이 광장은 1949년의 건국 식전행사를 위해 정비되었다. 1958년에 인민영웅기념비, 1959년에 인민대회당, 중국혁명 박물관, 중국역사박물관이 낙성되었다. 그리고 1977년에 모주석 기념당이 낙성되어 현재의 모습이 형성되었다. 현재의 천안문 광장은 천안문에서 정양문까지 남북 880미터, 인민대회당에서 박물관까지 동서 500미터, 총면적 40헥타르 조금 넘는 대광장이다. 북쪽에는 180미터 폭을 가진 출입구가 동서장안가로 통하며 광장 남단의 정양문 성루의 양쪽에 각각 200미터 폭의 출입구가 전문외대가(前門外大街)로 통하고 있다.

 이곳은 중국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이 벌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1919년 5.4운동이 시작되었던 곳도, 문화대혁명이 전개되던 곳도, 1966년 100만 명이 넘는 홍위병이 운집한 곳도, 1976년 4인방과 주은래 양편의 지지 세력 사이에 충돌이 있었던 현장도 이 곳이다. 또한 1989년 6월 천안문사태가 발발 한 곳 이기도하다.
 천안문광장은 1959년에 건설되었으며, 天安門에서 전문까지는 남북 880m, 인민대회당~박물관까지 동서 500m, 총면적 40만m2 나 되는 세계최대의 광장이다. 북쪽에는 천안문광장, 남쪽에는 전문, 동쪽에는 중국 역사박물관과 중국 혁명박물관, 서쪽에는 인민대회당 등 역사적인 건축물이 광장에 둘러싸여 있다.
 광장은 원래 흰 화강암으로 깔려 있었는데, 1999년에 8개월간의 대대적인 보수를 단행했다. 바닥을 교체했는데 연분홍색 천연화강암 28만개를 사용했다. 광장에 설치된 확성기도 1959년에 설치한 것을 첨단장비로 교체했다.
 진수이허(金水河) 분수대는 527개의 꼭지로 이루어져 있다. 이 광장에서는 40만인이 집회를 할 수가 있는데 동서장안가를 활용하면 100만 명이 넘는 대 집회도 가능하다. 장안가와 여기에 인접된 대로의 보도의 일각은 포석을 벗겨내면 그대로 화장실로 활용할 수 있게 되어 있고 장막을 주위에 치면 30명 정도가 동시에 변을 볼 수 있는 야외 화장실이 10분 내에 이루어진다. 이 화장실은 하수도와 연결 되어 있기 때문에 포석을 다시 끼우면 다시 보도로 환원된다.
 천안문 광장은 북경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광장의 남북길이가 880M, 동서의 넓이가 500M,면적이 44만 평방미터이다. 광장 안에는 100만 명의 군사가 들어가 집회 및 행사를 할 수 있는 ,세계에서 도시 가운데 있는 가장 큰 광장이다.
 천안문은 원래 명, 청 두 시기 황성의 정문으로 명나라 영락 15년(1417)년에 건조하기 시작, 당시"승천문"이라고 불렀다. 역사상 수차례 불에 탔었는데 1651년에 개수한 후 이름을 "천안문"으로 고쳤다. 명나라, 청나라 때 천안문은 황제가 조령을 발포하던 곳이며, 매년 동지에 황제가 천단에 가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하지에 지단에 가서 땅에 제사를 지내고 중춘에 선농단네 가서 몸소 밭갈이하며, 황제의 대혼, 출정 등 중요 행사시에 출입하던 문이다. 때문에 천안문의 건축 규제는 매우 높아 성문이 5개, 중루의 둥근 기둥이 9개이며, 중간문 전후에 각각 한 쌍의 한백옥석으로 만든 화표가 서있는데 꼭대기에 석수가 웅크리고 있고, 기둥에는 빙 둘러가며 구름송이를 조각하고 그사이에 거룡이 서리고 있다. 그리고 그 앞뒤에 두 쌍의 돌사자가 지키고 있다.
 공화국 창건 후 천안문 앞 좌우에 관람대를 증설하고 그 앞에 화단을 만들어 놓았다. 매년 봄, 가을이면, 이곳은 갖가지 꽃들로 오색찬란하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매우 북적북적하다. 관람대 앞은 금수하로서 그 위에 5개의 한백옥석 다리가 가로 놓여 있으며, 다리 난간에는 아름답고 정교한 도안과 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천안문 성루 앞이 천안문 광장이다. 1949년 10월 1일 모택동 주석은 천안문 성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선포하였다.
 ‘자금성’은 북경시의 중심에 위치한 명·청대의 황궁으로, 천안문 정문으로 들어가 울창한 가로수 길을 따라 단문과 오문을 지나 보이는 곳으로 중국에서는 고궁(故宮)이라는 이름이 더 친근하게 이용되고 있다. '자금성'이라는 이름은 "천자의 궁전은 천제가 사는 '자궁(紫宮)'과 같은 금지 구역(禁地)과 같다"는 데에서 연유된 것이다. 전체 면적은 72만㎡이며, 총 9999개의 방이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고대 궁전 건축물이다.
 1406∼1420년에 건조된 이래로 56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15명의 명나라 황제와 9명의 청나라 황제가 일생을 보냈고, 현재는 105만 점의 희귀하고 진귀한 문물이 전시·소장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자금성은 외조와 내정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오문과 태화문을 지나면 흔히 '3전'이라 부르는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이 나타난다. 3전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면 자금성의 내정에 이르게 되고 이곳에는 건천궁, 교태전, 곤녕궁 등이 있으며 동쪽과 서쪽에는 각각 동육궁과 서육궁이 자리잡고 있다.
 방어의 목적으로 궁전 밖에는 10m의 담이 있는데, 사방에는 성루가 있고 밖에는 호성강(護城河)이 흐른다. 80년대의 유명한 영화인 "마지막 황제"의 배경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꼼꼼하게 관광을 하는 데에는 하루가 꼬박 걸린다. 그냥 가로질러 가는 데에만도 2시간 정도가 걸릴 만큼 넓은 곳이다.
 또, 전에는 영화촬영의 배경지가 되었던 것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문화공연도 열려 문화유적지나 관광지로서 뿐만 아니라 중국시민의 휴식장소, 문화장소로서도 이용되고 있다.
1987년에 이르러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자금성을 구경하다 보니 커다란 무쇠항아리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것의 용도는 화재방재용 물탱크였다. 추운 겨울엔 물이 얼면 항아리 밑에 있는 아궁이에 불을 지펴 얼음을 녹여서 사용했다 한다. 태화전 앞에 있는 물탱크엔 10킬로그램 정도의 금도금이 되어있었는데, 서양 열강의 침략자들이 금을 긁어 간 자국만 남아있어 일본 침략기에 우리나라 수많은 도자기 및 보물들을 일본이 약탈해 간 상황이랑 오버랩 되어 입안이 씁쓸했다.
 자금성 관람 도중 외국 국가 원수가 자금성을 관광한다고(혹시나 그분이 오셨나...??) 그 수많은 관광객들의 관람을 저지하고 통제하는 모습을 보며, 공산주의의 중앙통제 정치의 한 면을 보는 것 같아 세삼 중국이란 나라의 오묘함을 느낄 수 있었다.
 자금성 안에 있는 ‘어화원’은 황제들이 후궁들과 ‘나 잡아봐라~’하면서 놀던 곳이고, 600년된 아카시아 나무가 아직도 건제해 있었다. 아름다운 돌들을 무더기로 쌓아놓고 그 위에 황제가 경치를 감상하는 정자라는 의미의 ‘어경정’을 지어놓고 그 옆에 400년 된 백송이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모습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자금성 관광이 끝나고...인력거 투어를 하러 간다...
 자금성 북쪽에 위치한 고가(옛날 집들...)들의 골목길을 달려보기도 하고, 고택을 직접 방문해 보는 ‘인력거 투어’를 했다. 집은 허름하나 땅값이 엄청 비싼 곳이니, 외형만 보고 빈민촌으로 오해하지 말라는 가이드의 설명을 듣긴 했지만, 지금까지 봐왔던 북경의 이미지와는 다른 더럽고 지저분한 모습에 얼굴이 찌푸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곳은 땅은 국가 소유이므로 집만 매매가 (우리가 들어갔던 집값이 우리나라 돈으로 90억정도...헉~~~하지만 사는 사람이 없어서 매매가 힘들다는 것..)가능하다 한다. 국가 지정 민속마을로서 6년에 한 번씩 보상을 해 준다고 한다. ‘북경 여름은 마누라 없인 살 수 있지만 에어컨 없인 살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북경 날씨는 후덥지근하다고. 그래서 에어컨 실외기 한 두대는 집집마다 보였다. 집안에는 화장실이 없고 공중화장실이 있는데 공중 화장실은 양옆 모두 터져서 서로 대화하며 일을 보는데 문화는 지역문화의 차이로 이해해 달라는 가이드의 말을 듣긴 했지만,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기야 제주도 응가 돼지도 이해가 안 되는데 하물며...
 점심은 만두 10종류가 나오는 만두 정식을 먹었다. 그런대로 먹을 만 했지만, 여전히 김치와 고추장 사랑은 식을 줄을 몰랐다.

 누적된 발의 피로를 풀기위해 발 마사지 샵에 들린 후 북경에서 가장 큰 코리아타운 인 왕징을 둘러보았다. 오후에 한국의 명동이라 할 수 있는 ‘왕부정 거리’를 둘러보았다.
왕부정은 자금성 동쪽에 인접한 상업지구다...우리나라의 명동이라지만 확실히 다르다. 백화점 화장실이라고 해서 가봤는데 이건 우리나라의 시골 허름한 가게 화장실 보다도 못하다.
(으~~~~ 스멜~~~~쩝;;;)
왕부정은 처안라 시대부터 베이징의 중심 저잣거리이다. 왕푸는 황제의 혈족이나 귀족들이 사는 대저택을 뜻하는데 그들이 길어 마시던 우물이 있던 자리라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처음에 이야기 했듯이 여기에선 정해진 가격이 없다. 정찰제라고 붙어진 물품도 있지만 무조건 흥정부터 해본다. 누구는 20원 주고 사고 누구는 10원주고 사고 같은 물건이지만 흥정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다.(지금도 누구는 쓰린속을 달래고 있을텐데...흐흐흐) 흥정의 달인은 우리 일행중에도 있었다. 어느것 하나 그냥 사는법이 없었다.가격 흥정이 안되면 덤으로 물건을 가지고 온다. 아마도 보따리 장사를 하기위한 모양이다. 대단하다고 말할수 밖에...(님 쫌 짱인듯...)
어떤 선생님이 산 전갈 튀김을 꼬리 쪽만 살짝 먹어봤는데 생각보다 기름에 튀겨진 맛 외에는 별맛 없다. 절대 추천해주고 싶은 음식은 아니다.. (완전 비추) 그래도 한번은 도전해 봐라...! 일단은 죽음이다....윽~ ~~ 그와중에서도 맛있다고 매미까지 사서 드시는 선생님은 누구여요...??
저녁엔 불고기 만찬을 즐겼다. "칭따오비조 쓰가" 빠지지 않은 소리다. 이제 이런 주문도 자주쓰는 말이 되어버렸다. 생각보다 많이 먹진 못했다. 고추장은 여전히 밥상 위에 올라왔다.
북경에서의 마지막 밤.. 어떻게 저녁을 멋지게 보내볼까?? 고민하다가 가이드와 원장님 그리고 모든 일행들과 의견을 투합하여 북경의 밤문화를 체험해 보자고 했다.(남자들은 대환영) 그런데 가이드왈.. 북경의 밤문화는 없다고 한다...남자들이 직장일이 끝나게 되면 바로 집으로 고고씽하여 빨래하고 시장봐서 밥하고 반찬 만들고 애기보고 한단다. 남자들이 일찍 들어가버리기 때문에 거리에 사람들이 없다고 한다.여자들은 식사준비 하는동안 마작을 하거나 공원에서 산책을 하거나 친구들을 만나서 수다를 떤다고 한다.어찌 이렇게 부러울 수가... 부러우면 지는거라는데 난 완전 북경 여자들한테 졌다. ㅠㅠ 그래서 아쉬운데로 숙소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저렴한 꼬치구이 집으로 가이드가 안내를 해 주었다. 맥주며 안주가 무지 저렴했다. 처음 가이드가 얘기 했듯 열린 마음으로 좋은 여행 동반자가 되도록 노력하며, 좋은 가이드를 만나면 여행의 질이 달라진다는 말은 진실로 참말이라는 생각을 이번 여행을 하며 절실히 느꼈다.
어떤 장소든, 어떤 인물이든 질문을 하면 반갑게 질문내용은 물론이요, 부연 설명까지 자세하게 막힘없이 설명해 주는 현지 가이드를 보면서 배운 것이 많다. 끝임 없이 공부하고 자신의 일에, 즐거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상을 향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사람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자긍심과 자부심, 아름다운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자신도 지금껏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자신을 채찍질하며 열심히 살아왔다 자부했는데 아직 당당 멀었구나 싶었다. 항상 늦었다고 생각 될 때가 실은 빠른 때라는 말을 믿고 더욱 열심히 알차게 살아가야 될 것 같다.

5.다섯째 날(8월 31일-화요일)

오늘도 아침 일찍 마지막 호텔식 뷔페를 먹었다..진짜 웃긴건..뷔페이지만..5일동안 메뉴가 바뀌지 않는다..항상 그대로..(ㅠ...ㅠ) 빠진 물건 들이 없는지 다시한번 체크하고.. 낙오된 사람은 없는지 숫자도 세워 보고 북경 서주 국제 공항으로 출발....이건 진짜 실화라고 하는데 중국으로 여행 온 할아버지가..호텔에 틀니를 놓고 오는 사건이 있었단다...이후로 북경 가이드 사이 에선 틀니를 놓고 오신분이 없냐고 ?? 꼭 물어 본단다. 공항에 도착하니 이상하다..(뭔가 두고 온 느낌.....) 출국수속을 하고..게이트로 빠져 나가면서 그동안 우리들의 눈과 발이 되어준 가이드분과 작별인사를 하고...(웬지..5일동안 한식구같앗는데..)
면세점에서 지인들 선물도 사고......첫날 오던 반대의 순서로 무안공항으로 향하였다. 점심은 기내식으로 불고기 백반을 먹었다.뭐 이정도는 이제 맛있게 먹을 수 있다.
광주에 도착하니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다. 우리 16인 용사의 무사귀환을 환영하는 비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대표원장님을 비롯하여 여러 원장님들의 무사귀환 축하 말씀을 뒤로 하고 행복한 나의 보금자리로 돌아오니 너무도 행복했다. 아마 서태후가 지금의 나보다 행복하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해봤다.ㅎㅎ
집을 떠나 봐야 집을 소중함을 느낀다더니 명언이란 생각이 들었다.
 인공 건축물의 백미를 장식하는 ‘만리장성’, ‘용경협’을 비롯하여 ,웅장함의 극치인 ‘천안문광장’, ‘자금성’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압도당하는 느낌을 자연스럽게 스미게 하는 곳이었다. 또한 ‘이화원’, ‘천단공원’의 아름다운 호수와 정원은 대국의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곳이라 할만했다.
 며칠간은 여행의 여독으로 고생을 좀 하겠지만, 보고 듣고 느낀 북경에서의 4박 5일은 내 인생에 참 많은 영향을 미칠 것 같다.
 앞으로 세계의 중심은 중국이 될 것이라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 아이들이 앞으로 세계인이 되기 위해서는 중국어가 제일 외국어가 되는 날이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끝임 없이 변화하고 성장하고 있는 북경을 바라보며 내 아이들을 어떻게 성장시켜야 되는지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 단계 진일보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첨단병원에 감사드리며, 앞으로 많은 직원들이 나와 같은 기회를 갖게 되기를 바란다. 별 탈 없이 무사히 잘 다녀오신 여러분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 게시물은 첨단종합병…님에 의해 2016-10-10 09:46:04 병원소식에서 이동 됨]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